*본 토론 논제는 인문학 공동체 에피쿠로스에서 만들었으며 동작도서관에서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실제 독서회에서는 검은 글씨 논제는 건너뛰고 빨간 글씨 논제로만 진행하였습니다.
□ 토론 논제
1. 책 읽은 소감을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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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책의 제1부 ‘삶’ <당신의 삶에서 당신의 철학을 본다>에서 저자는 ‘철학의 지혜란 함께 살고 부딪치면서 스스로 길러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함께 살고 부딪치기’보다 ‘경계’ 내지는 ‘무관심’으로 ‘부딪침’을 피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활하고 계시나요? ‘함께 살고 부딪치’는 것을 피한 적이 있는지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앎’이란 오랜 사귐과 공동생활을 통해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서 생겨나 스스로 길러낼 것‘이라고. 철학의 지혜란 홀로 득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런데 함께 살다보니 온갖 마찰이 생긴다. 그 마찰은 우리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돌멩이들이 부딪치면 그렇듯, 우리의 부대낌은 열을 내고 때로 불빛을 튀게 한다. 그 불꽃이 영혼의 램프에 옮겨 타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의 지혜가 아닌가. (p.29) |
3. 저자는 책의 제2부 사건 <책을 읽어주던 남자>에서 노들야학 학생들과 니체를 공부할 책으로 「차라투스트라」를 선정하고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하여’를 읽은 후 자신의 주변에서 ‘죽음의 설교자’를 찾아오라는 과제를 내줍니다. 여러분에게 죽음의 설교자는 누구인가요 혹은 무엇인가요?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시작됐다. “말은 어떻게 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이 내게 살 가치가 없는 곳이라고 속삭이는 존재들이 있다”고, 그들을 ‘죽음의 설교자’라 한다고 했다. 첫 텍스트를 ‘죽음의 설교자’로 시작한 것은 힘든 세상을 회피하지 말고 직시해야 하며,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 세상에서 삶을 가꾸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p.116) |
4. 제1부 ‘삶’ <대학의 앎은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가>에서 이 책 저자는 대학의 역사를 아래와 같이 기술하면서 이제 대학이 기업화되어 ‘우리 삶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저자의 이 주장에 동의하시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요?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의 말을 빌려보겠다. “12세기의 지식인은 자신을 다른 도시민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장인이요, 직업인으로 인식한다. 그의 기능은 자유 학예들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학예(art)란 무엇인가? 그것은 학문이 아니라 기술이다. 아르스(ars)는 테크네(techne)이며, 그것이 교수의 특기인 것은 목수나 대장장이가 나름대로의 특기를 지닌 것과 마찬가지다.” 굳이 말하자면 이들은 ‘정신의 장인’, ‘말과 글의 장인’이었을 뿐이다. 당시 도시의 많은 이들이 생계를 위해 길드, 즉 동업조합을 결성했다. 이 ‘정신의 장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만든 길드, 삶의 방편으로 만든 이 코뮨이 다음 세기에 ‘우니베르시타스’, 즉 ‘대학’이라고 불렸다. 한 마디로 대학은 ‘앎’과 ‘배움’을 매개로 한 ‘삶의 공동체’였던 셈이다. (…) 대학 건물이 따로 없었기에 청중이 많을 경우 교사들은 옥외에서 강의를 자주 열었다. 추운 겨울에 땅바닥에 그대로 앉을 수 없었던 이들은 짚(fouarre)을 깔았기 때문에, 대학이 열렸던 거리 이름이 ‘푸아르’가 된 것이다. 다른 장인들이 물건을 내놓듯이 그들은 가르침을 전했고 거기서 생활에 필요한 수익을 얻었다. (…)
하지만 13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대학의 운명에 관한 중요한 논쟁이 일었다. 대학인은 자신의 생계를 직접 해결해야 하는가. 한쪽에서는 “사람은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야 한다”며 수업료에 기반한 기존 방식을 지지했고, 다른 쪽, 특히 탁발수도회 측(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쿠스회)은 교사는 보시(布施) 내지 ‘탁발’을 통해서 살아가야 한다며 학생들에게는 수업료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 그런데 문제는 ‘보시’와 ‘탁발’이 누구에게서 나오느냐였다.(...) 13세기말, 14세기에 접어들면 대학은 후원자(교황, 군주 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p.51~53) |
대학의 기업화는 20여년 전부터 한국 대학사회를 지배해온 흐름이었다. 1996년 삼성은 성균관대를 인수했고, 이듬해에 성균관대는 총장 직선제를 폐지했다. 1980년대 대학 민주화 운동의 산물로 생겨난 총장 직선제는 성균관대 이후 대부분의 사립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는 국립대에서조차 총장 직선제를 실시하는 대학이 없다. 총장 직선제가 폐지되면서 CEO 총장의 전성시대가 시작됐고, 대학은 스스로 기업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성균관대의 뒤를 이은 건 중앙대였다. 2008년 5월, 두산그룹은 학교법인 중앙대학교를 인수했다. 두산재단 6년, 중앙대에서는 대학 기업화의 갖가지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기업의 입맛대로 대학의 수장이 앉혀지고, 학문 단위가 재편됐으며, 커리큘럼이 고쳐졌다. 성과급형 연봉제의 도입으로 교수들은 두산의 사원이 됐다. 교수, 학생, 교직원을 망라한 2만5000명의 중앙대 구성원들은 두산의 대학 기업화 실습 강의를 들어야 했다. 절대적 상대평가제인 D학점 의무제가 도입되면서 학생들 중 몇 명은 반드시 낙오자가 됐다.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은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선언하고 극단적인 기업식 경쟁체제를 대학에 도입한다.
취업률을 기준으로 18개 단과대학 77개 학과를 10개 단과대학 40개 학과로 통폐합하는 사상 초유의 구조 조정안이었다. - <대학생이 바라본 대학의 기업화>(주간경향 2014년 4월 1일자) |
5. 저자 고병권은 제1부 <삶> <탈시설, 그 ‘함께-삶’을 위하여>에서 현대사회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가지 시설 설치를 포기하고 심지어 그 시설에서 빠져 나와야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저자의 이 주장에 동의하시는지요? 동의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시설’ 입소는 일종의 ‘추방’이면서 또한 ‘포획’이기도 한다. 가족, 국가, 자본에 의한 ‘내다 버림’은 새로운 ‘붙잡음’이기도 하다. 우리는 ‘시설’에서 가족과 국가, 자본의 복합체를 발견한다. 먼저 가족이 포기한 곳에서 가족관계가 만들어진다. 장애인과 관리자로 이루어진 시설은 흡사 ‘대가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시설관리자들과 시설 장애인은 대체로 부모와 어린아이의 관계를 맺는다. 한편으로 보면 가족을 떠나온 수용자에게 후견인이 되어주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부장의 권력을 수용자에게 행사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준애 씨 증언.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면서 여름엔 나시도 입으면 안 되고, 치마도 입으면 싫어했지요. 외출할 때 여자들은 빨리 들어와야 하고 남자 친구가 생기면 무슨 일 있었느냐 어디엘 다녀왔느냐 물었어요. (...) 별점을 무서워했는데, 잘못해서 별점을 받게 되면 반성문, 시설에서의 노력 봉사, 한 달 간의 외출금지를 받았거든요.”
다른 한편 장애인을 노동시장에서 지배했던 자본은 ‘시설’에서 장애인의 신체와 장애인의 생명이 가진 상품성을 발견한다. 시설의 대규모화 현상은 수용장애인 수에 따라 정부보조금이 지급되는 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 한 사람은 그 존재로 매달 40만원의 매출을 올리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노동 강요가 여러 곳에서 벌어진다. 배덕민 씨의 증언. “부업으로 마늘도 깠는데, 아침 먹고 까고, 점심 먹고 까고, 저녁 먹고 까고, 돈도 못 받고 죽도록 일만 했어.” (p.77~78) |
6. 이 책 제2부 <사건> <책을 읽어주던 남자>에서 저자는 노들야학 강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책의 내용을 요약해서 전달하기만 하는 것은 축소이고 왜곡’이라며 ‘독서’라는 사건을 만날 때 ‘자유를 전하고, 용기를 전하고, 기쁨을 전하고, 감동을 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들을 전하기 위해 교육자로서 갖춰야 할 자질과 노력할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자유롭게 이야기해보세요.
나는 책의 내용을 요약해서 전달하는 것에 교사의 소명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 요약하고 전달한다면 그것은 축소이고 왜곡일 것이다. 축소나 과잉, 왜곡이 아닌 순수한 독해가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교육자는 책을 읽어 줄 때 혹은 책을 권유할 때, 다시 말해 ‘독서’라는 사건 속에서 ‘제자’를 만날 때, 뭔가 다른 걸 전달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는 책을 읽어주고 권유하면서 자유를 전하고, 용기를 전하고, 기쁨을 전하고 감동을 전하는 것이다. 책에다 그런 걸 얹는 것이다.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를 전하지 않은 채 책을 권유한다면 우리는 매장의 점원과 크게 다르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다. (p.126) |
*깜짝 논제. 여러분이 원하는 최고의 도서관의 모습은? 도서관 사서들이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도서관 이용자로써 지금까지 거의 겪어보지 못했지만 도서관 사서로부터 꼭 제공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서비스가 있다면?
당시 사서 선생님은 내게 책도 시간도 건네 주셨지만, 그런 일들을 교육자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공공도서관의 ‘직원’도 , 심지어 도서대출 자동기계도 그런 사무는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배움을 일으키는 자는, 책을 건네고 시간을 건넬 때, 뭔가 다른 것도 건네야 하는 게 아닐까 (...) 물건을 교환하는 일은 누구나 하는 일이다. 하지만 연인들이 잘 알 것이다. 물건이 전달될 때, 물건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잉여의 것이 소통된다는 것, 그 ‘잉여의 것’이 두 사람을 ‘연인’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핵심임을. 독서 교육자도 마찬가지다. 어떤 책을 골라줄 때, 어떤 책을 권유할 때, 어떤 잉여의 것이 필요한 것 같다. (p.111) |
7. 이 책 제2부 <사건>에서 저자는 <어느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야기를 읽으시고 사건이 일어난 것은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해보세요.
2010년 10월, 장애인 아들을 둔 가난한 일용직 아버지가 아들에게 기초생활 수급권과 장애아동수당을 주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야기말이다. 그 아버지는 처음에는 용접공으로 일했다. 그러다 일자리를 잃고 건설일용직으로 전전했지만 그마저도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 병원비는 아버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들을 장애인으로 등록하면 장애아동수당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서둘러 신청하려 했으나, 장애아동수당을 받으려면 본인이 국민기초생활 수급자여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려고 하니 본인에게 노동 능력이 있어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고 했다. 노동시장에 내놓아도 팔리지 않는 노동 능력. 그러니까 그가 ‘산노동’을 가진 존재라는 것 때문에 정작 아들이 죽게 생긴 것이다. 그는 ‘내가 죽어야 아들이 산다’는 정신 나갈 정도로 비극적인, 하지만 지금의 이 ‘정신 나간’ 시스템에서는 과히 틀리지 않은 결론에 도달했다. ‘아버지의 해법’, 다시 말해 ‘아버지의 죽음’은 그렇지 않아도 몸 놀리는 게 편치 않은 아들의 맘에 평생 무거운 짐으로 지어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서가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판다. “아들이 나 때문에 못 받은 게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동사무소 분들에게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나 때문에’라고 썼다. 그리고 ‘동사무소’에, 그러니까 ‘국가’에 잘 부탁한다고 했고, 그것을 국가가 베풀어주는 ‘혜택’으로 묘사했다. 정말 누구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는 ‘나 때문에’라고 썼다. (p.156~157) |
8. 이 책 제2부 <사건> <민주주의, 그 새로운 무한정성>에서 저자는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일상을 계속해서 반체제적으로, 비자본주의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반체제적이며 비자본주의적’으로 ‘살아가겠다’는 실천 약속을 자유롭게 이야기해보세요.
7월초 밀양에 내려갔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그곳 노인들이 화악산에 설치한 움막을 보며 나는 “저것이 야전사령부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누군가 답했다. “그곳은 또한 동네사랑방”이라고. 주민들의 투쟁 거점이지만 또한 오순도순 이야기하고 음식을 나누는 사랑방이라고. 나는 이처럼 국소적으로 만들어지는 해방구, 그것이 이 체제의 표면에 수많은 구멍을 내기를, 그리고 끝에 가서는 ‘삶의 표면을 무한대로 만들되 부피를 제로로 만드는’ *멩거 스펀지(Menger Sponge) 같은 것이 나타나기를 희망한다. 물론 어떤 극적인 사건(희극이든 비극이든)에 의해서 그것이 무너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덜 중요해 보인다. 우선 할 일, 아니 무한정 할 일은, 우리의 일상을 계속적으로 반체제적으로, 비자본주의적으로, 혹은 우리가 살고 싶은 삶으로 구성해 가는 것이다. (p.150~151) *정육면체의 한가운데에 정사각형 구멍을 뚫는 과정을 무한히 반복해서 만드는 프랙탈(일부 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 도형
<4단계까지 구멍을 뚫은 멩거 스폰지> |
□ 이 책과 같이 읽으면 좋은 책을 추천해주세요.
(미리 생각해서 적어오기)
* 책이름:
* 서명:
□ 책을 읽은 후 나의 삶에 적용할 실천사항을 이야기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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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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