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토론 논제는 인문학 공동체 에피쿠로스에서 만들었으며 동작도서관에서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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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 읽은 소감을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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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책 속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듯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갑니다. 하지만 저자가 아무리 친절하게 주장해도 여러분이 끝내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떤 대목에서 저자와 생각을 달리 하는지 이야기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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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저자는 <인문적 통찰을 통한 독립적 주체되기>라는 첫 번째 장을 통해 현재 우리나라의 인문학 열풍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에서 인문학 열풍이 부는 이유는 무엇이며, 한국은 인문학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또한 이러한 인문학 열풍 뒤에 한국사회의 예상되는 변화를 자유롭게 이야기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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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래의 제시문에서 저자는 ‘신념과 이념과 가치관’은 ‘내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바로 내’가 되기 위해 벗어버리라고 말합니다. 개인이 ‘신념과 이념, 가치관’을 갖지 않고 제시문에서처럼 ‘하고 싶은 대로 질러’ 버린다면, 우리는 행복할까요?
이 세계에 살면서 생존을 효과적으로 잘 도모하고 자신만의 의미로 충만한 삶을 영위하려면 가장 근본적으로 이 무늬의 정체를 알아채고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것을 알지 못하게 합니까? 이미 자기안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주인 행세를 하는 기존의 이념이나 가치관이나 신념이지요. 이미 있는 것들은 항상 주인 자리를 뺏기지 않으려고 새로운 것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기 일쑤입니다. (...) 신념과 이념과 가치관은 기본적으로 집단이 공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유하는 ‘우리의 것’이에요. ‘나만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념과 이념과 가치관, 즉 ‘우리의 것’을 벗었다는 게 뭐냐 하면 비로소 ‘내’가 되었다는 겁니다. (p.65~71, 이념은 ‘내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다) |
5. 저자는 <정치적 판단과 결별하라>는 제하로 일반인과는 다른 성인(聖人)의 특징으로 ‘조짐을 읽는 능력’을 꼽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며 느끼는 여러분의 조짐은 무엇이며 그러한 조짐에 따라 어떤 결과가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해보세요.
인문적 통찰은 정치적 판단과 결별하는 것이 첫째 조건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기 삶을 이끌고 가는 사람이나 어떠한 사회 조직을 이끌고 가는 사람을 ‘리더’라고 합니다. 예부터 동양에서는 이 위대한 리더를 성인이라 했지요. 그런데 성인은 일반인과는 다른 특징이 있어요. 다른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이 뭐냐? 바로 조짐을 읽는 능력입니다. 한비자라는 고대 중국의 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인은 아주 작은 현상을 보고 사태의 조짐을 알고, 사태의 실마리를 보고 최종 결과를 안다.” (...)
그런데 조짐으로 읽힐만한 어떤 현상을 보고 ‘좋다’라거나 ‘나쁘다’는 판단을 하는 것은 문명의 큰 흐름을 알 수 잇는 가능성을 단절시켜 버리고 인식을 바로 거기에서 정지시켜 버립니다. 인문적 판단을 하는 사람은 ‘좋다’거나 ‘나쁘다’라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p.45~46) |
6. <제시문A>는 ‘어떤 일을 신념이나 이념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자기 욕망에 기초해서 자기 행위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욕망만이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는 이 책 최진석 저자의 주장이며, <제시문 B>는 현대적 사유로 인정받고 있는 라캉과 들뢰즈의 욕망이론입니다. 이들에 따르면 ‘욕망이란 당초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으로 ‘나를 둘러싼 환경의 배치가 주체의 욕망을 부추긴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제시문 A>의 주장에 동의하나요, 아니면 <제시문 B>의 주장에 동의하나요?
제시문 A
서양 학자들에게 “당신은 왜 이 공부를 합니까?”하고 물으면 묻는 사람이 머쓱할 정도로 간단한 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답의 길이도 짧습니다. “Because I like it.” 그 사람들은 “나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죠.”라고 단순하고 명쾌하게 대답합니다. 거창하지 않아서 별 의미 없어 보이지만, 저는 이 대답에서 중요한 힌트를 얻습니다. 왜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창의적인가? 왜 그 사람들의 사회가 우리 사회보다 부패지수가 더 낮은가? 왜 그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행복한가? 제가 보기에 이유는 바로 “Because I like it!”이라는 대답 습관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단지 그걸 좋아하니까 한다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은 자기 욕망에 기초해서 자기 행위를 결정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을 자기가 할 수 있어요. 어떤 일을 신념이나 이념의 지배를 받아서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하는 것이지요. 왜? 욕망은 바로 자기니까. 욕망만이 자기 자신입니다. 욕망에서 출발한 일만 잘할 수 있어요. 자기가 하니까 독특하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창의적 결과가 나오는 거예요. 자기 욕망이 실현되니까 행복할 수밖에요. (p.195~196, 명사에서 벗어나 동사로 존재하라)
욕망은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는 터전이에요. 이 터전을 잡고 있는 삶은 주도적이고 일류이며, 행복하며, 역동적입니다. 이 터전을 잡고 있는 개인들이 많이 모인 사회도 그렇고요. 이런 질문을 한번 해보죠. 여러분은 근대인입니까? 현대인입니까? (근대적인) 태도가 한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라면 좀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p.270~271, 욕망, 장르를 만드는 힘) |
제시문 B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desire)'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욕망을 욕구(need)와 요구(demand)로 구별하는데 '욕구'는 식욕, 성욕처럼 가장 일차적인 충동이지만 요구는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것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 욕구는 언제나 요구를 통해서 표현되고 충족되어야 하기에 그 충족은 늘 불충분할 수밖에 없고 욕구와 요구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욕구와 요구 사이의 격차로 욕망이 생겨난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결핍'이다. 라캉에 의하면 무의식이란 타자(다른 사람, 사회적 용인, 사회적 질서)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인정 욕망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는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갖고자 하며, 타자의 욕망의 대상임을 인정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내 ‘자리’는 내가 아니라 사실은 타자가 지정한 자리라는 것이다. 라캉에 의해 자아의 중심성은 거꾸로 타자의 중심성으로 전환된다. 그래서 그는 데카르트를 겨냥해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생각하는’(지정하는) 곳, 즉 내가 생각하지 않은 곳(즉 타자의 담론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라캉이 보기에는 ‘나’ 혹은 ‘자아’라는 주체는 어떤 중심성도 통일성도 갖지 않으며, 오히려 타자의 담론, 타자의 욕망으로 나타난 무의식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들뢰즈 또한 <안티 오이디푸스>를 통해 욕망이란 ‘나’란 주체 속에 속하는 게 아니라 나와 내가 만나는 것들과 관계 속에 속한다고 한다. 즉, '나'는 어떤 것들과 계열화되느냐에 따라 다른 욕망을 갖게 되는데 이를 두고 '욕망은 배치다'라고 표현한다. 욕망이란 주체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둘러싼 환경의 배치가 주체의 욕망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프랑스 68혁명을 경험했던 들뢰즈가 68혁명 과정에서 제기되고 보여진 것들, 즉, 사람들이 강렬하게 자신들의 욕망을 분출했음에도 왜 금방 보수화되는가, 왜 예속을 욕망하는가 등의 문제가 성찰되면서 이루어졌다. |
7. 여러분이 그리는 무늬 혹은 그려나가고자 하는 무늬를 이야기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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