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권 독서일기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돌이 2011. 8. 12. 00:43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출판사 | 2006-03-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무라카미 하루키 처녀작이자 자전적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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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실로 간단하다.

갑자기 무언가가 쓰고 싶어졌다. 그뿐이다.

정말 불현듯 쓰고 싶어졌다.』

 

이 소설을 읽고자 마음먹고 책장을 넘기면 볼 수 있는 하루키의 서문이다. 소설 감상에 앞서, 독자로 하여금 이를 주안점에 두고 감상하길 원한다는 작가의 의도인지 독자에 불과한 나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자명한 것은 내가 지금 볼 수 있는 이 창작물은 펜이 가는 대로, 술술 써지는 대로 쓰여 졌다는 것이다. ‘소설’을 써본 ‘범인’들은 알 것이다. 하루키가 적은 서문처럼, 소설 창작은 결코 펜이 가는 대로, 술술 써지는 대로 써지는 것이 아니다. 백 만 번의 자기 학대, 천 만 번의 자기 비하에서 잉태되는 것이 소설이다. 그리하여, 소설을 쓰기 위한 워드 프로그램의 하얀 바탕은 창작자로서는 큰 공포다. 알알이 느껴지는 공포감에 질겁하여 도망치기만 했던 나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공포감 없이 군조신인상을 수상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하루키에게 부러움이 내재된 질투를 느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들을 접할 때면, 괜히 삶이 공허하고 무력해진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는 주인공 ‘나’와 다른 인물들과의 만남, 그리고 이별을 통해 ‘상실’의 정서를 이야기한다. ‘나’와 ‘쥐’, ‘나’와 ‘제이’, ‘나’와 ‘그녀’와의 관계는 서로에게 적당히 무관심한 현대인의 대인 관계를 토대로 이른바 관계의 불완전성을 의미하고 있다. 이 관계의 불완전성은 ‘상실’의 정서와도 상통하는 것인데, 산업화 이후로 인간 소외 현상이 보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가장 보편화된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는 많은 작가들은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소설을 생산해냈다. 하루키도 그 중 한 명인데, 하루키가 현대인의 정서를 그려낸 다른 작가와 공통점인 점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현대 출판 시장에서 막대한 시장가치를 가지고 있는 자기계발서가 삶에 대한 열의를 고취시켜 준다면, 역으로 현대인의 상실감과 소외를 그려낸 소설은 자기계발로 얻은 현대인의 열의 따위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기계발서가 세련된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부여한 열의를 위장된 무자비하게 거세해버린다. 예쁜 포장지에 쌓여진 선물을 때 묻은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놓듯이, 하루키는 주인공 ‘나’를 본인의 아바타로 내세워 이 책에서 그러한 악인의 역할을 자처한다. 공허감과 결핍감을 전면으로 내세우며, 삶에 대한 열의와 미래에 대한 환희 같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독자들에게 말한다.

 

반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현대인의 정서를 그려낸 동시대의 다른 작가와는 그것과는 차별성을 가지는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애(性愛)의 묘사이다.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성애를 반복적인 일상의 일로 묘사한다. 그의 성애 묘사에는 사춘기 소년들이 좋아할만한 과장도, 허위도 느껴지지 않는다. 주인공 ‘나’에게 있어, 성관계는 막대한 사건이 아닌, ‘성욕’을 충족시킬 만한 생리적 기능이 발현된 행위 중의 하나다. 특별한 문제 의식 없이,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더러워지면 물로 씻듯이, 성관계는 상대와의 합의만 보장되어 있다면, 행하는 반복성을 가진 일 중의 하나일 뿐이다.

 

둘째, 서사의 ‘건조함’이다. 이 소설에는 인물들에게 있어서 막대한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물들이 삶의 양식을 바꿀 사건이 존재하지 않아, 판타지를 즐겨 읽거나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서사 전개 방식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다. ‘기승전결’ 이라는 글의 기본 양식과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이라는 소설의 구성 단계를 발칙하게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서사 구조가 아니라, 온건하고 담담한 서사 전개 양식을 보인다.

 

셋째, 서사의 비(比)일관성이다. 소설에는 뜬금없이 낯선 내용을 담고 있는 문장들이 등장한다. 내용 전개와 일치하지 않는 문장들도 나온다. 투망 그물처럼 그냥 불현듯 던지는 그물에, 읽는 이는 당황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도리가 없다. 서사의 비(比)일관성의 예를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나에게는 작은아버지가 세 분 있었는데, 한 분은 상하이의 교외에서 돌아가셨다. 전쟁이 끝난 이틀 뒤에 자신이 묻었던 지뢰를 밟은 것이다. 단 한 분, 유일하게 아직까지 살아 있는 (중략)12p'

 

넷째, 의미의 '애매모호함'이다. 다시 말해, 소설의 구체적 의미를 무엇을 모른다는 것이다. 삶의 교훈이나 깨달음을 나타내기보다는 날것 그대로의 삶의 양식을 보여주는 하루키 특유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도시인으로서, 그리고 현대인으로서의 삶을 그려내는 데 중점을 둔 소설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명확한 메시지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글의 주체 찾기,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 찾기 와 같은 명확하고 분명한 답이 존재하는 훈련들과 국어 교육을 받아 온 나에게는 하루키의 소설을 불편하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불편함에 대해서는 나의 미성숙함이라 해두자. 나와 다른 정치 이데올로기나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보면 불편한 것과 같다고 본다. 똘레랑스의 부족일 수도 있으니, 그저 나의 관용의 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섯째, 다양한 장치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상품으로 받은 티셔츠 그림도 직접 제시될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 걸스'라는 노래의 가사 또한 직접 등장한다. 이러한 장치는 여타 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장치로서, 이같은 차별성에서 하루키의 매력과 섹시함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한 문장도 쓰기가 힘든 나에게 좌절감을 선사했던 하루키의 서문을 인용하여, 감상문에 마침표를 찍고자 한다. 

 

『이 독후감을 끝마치는 계기는 실로 복잡하다.

갑자기 무언가가 쓰기 싫어졌다. 그뿐이다.

정말 불현듯 쓰기 싫어졌다.』

 

염치없게 사족을 달자면, 더 이상 쓰기 싫어져서 안 쓰는 것 뿐이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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